2024. 1. 19. 13:19ㆍ여행과 삶의 철학
1. 종묘의 역사
종 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1395년 조선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 지었다. 주례에는 ‘궁궐의 왼쪽 종묘, 오른쪽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여 종묘는 궁궐의 왼쪽에 배치되었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종묘는 1608년 중건하였다 또 신주수가 늘어나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만을 종묘라 했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년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르고 있다. 정전의 신실 19칸은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로 되어 있으며 영년전 신실 16칸은 34위의 신주 총 83위, 공신당의 공신위 역시 83위를 모시고 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2. 종묘의 구성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은 정전, 영년전, 공신당, 칠사당
이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은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이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외대문에서 곧게 뻗어 있는 길에는 거친 돌은 왕을 포함해서 제사에 참여한 제관들이 경박하게 빨리 걸어가면 안 되기 때문, 일부러 거친 돌을 깔아 몸가짐을 조심하게 한 것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지붕 용마루, 처마, 기단, 담의 높이를 유심히 보면 모두 다르다. 지붕과 기단의 높이는 신실 - 협실 - 월랑 순으로 낮아지고 기둥의 굵기와 높이도 같은 순서로 가늘어지고 낮아진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1) 신로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 것으로 신(神)만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종묘에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神香路), 향로(香路),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 등이 있다. 종묘 외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 가닥 길로 깔려 있다. 가운데 길이 약간 높고 양옆은 약간 낮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 향ㆍ축문ㆍ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신향로는 종묘 정전과 영녕전 남쪽에 난 대문에 이르러 묘정 상월대 아래에 닿기 때문에 이 남문을 신문(神門)이라 한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에 이르러 재궁 서문에서 정전 동문, 영녕전 동문으로 이어진다.
(2) 중지당
종묘에는 물이 담긴 연못(지당)이 세 곳 있다. 사각형의 지당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 사상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궁궐 지당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3) 향대청 일원: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ㆍ축문ㆍ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 동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4) 망묘루
망묘루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 두기도 하였다. 망묘루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연못 방향의 두 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5) 공민왕 신당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조선 왕조 최고의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하고,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 키로 하여 공민왕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6) 재궁 일원 :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곳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재실, 세자재실,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 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7) 정전일원 :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곳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 와 모 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제관과 집례관들은 월대에 도열하여 제례를 행한다.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정전 봉안 신위 : 현재 정전에는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 다음 칸부터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익종, 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 대)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주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8) 신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곳
조선시대의 종묘는 하나의 건물 안에 신실을 따로 두어 각 신실마다 역대 왕과 왕 비의 신주를 모신 동당이실(同堂異室)로 되어 있다. 정전과 영녕전 신실 북쪽 벽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다. 각 감실 주위에는 사방과 천장에 황색의 휘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따로 황색의 휘장을 쳐서 마치 생전의 침상과 같이 꾸몄다. 각 감실 사이에는 발을 내려뜨려 구획을 나누었다. 감실 앞에는 주렴(珠簾, 발)을 내렸으며, 감실 위에는 집 모형의 닫집을 설치하고 구름과 연꽃을 조각하여 천상의 세계를 나타냈다. 밤나무로 만든 신주는 각 감실 중앙 뒤쪽의 신주장(神主欌)에 모셨는데, 왕의 신주는 서쪽에, 왕비는 동쪽에 모셨다.
(9) 공신당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창건할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정전에 모시는 왕의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배향 공신들의 위패도 늘어나 지금과 같이 83위를 모신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10) 칠사당
칠사당(운명, 집, 여행 등을 맡은 일곱 신들의 위패)은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다.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봄· 여름· 가을 · 겨울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11) 영녕전 일원: 왕실 신주를 모신 별묘(불천지위를 얻지 못한 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 , 16실 34 위)
1421년(세종 3)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다.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 廟)라고도 한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마찬가지로 이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ㆍ남ㆍ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비를 모신 곳으로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의 협실 각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 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정전과 같이 세면을 벽으로 감쌌으며, 내부 공간은 트여 있으나 가운데 4칸과 좌우 협실 사이는 벽을 두어 구분하였다.
(12) 악공청
정전 서남쪽 담장 밖에 위치. 제례악을 준비.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3. 종묘의 가치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1995년 서울의 다른 유적지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보호와 한국문화 전통 보존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 목록에 등재됐다. 종묘는 수세기에 걸쳐 확장과 개조를 하며 유교 의례와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묘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군주제의 역사적 연속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를 형성해 온 뿌리 깊은 유교 전통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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