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역사, 주요 전각 특징

2024. 1. 21. 13:35여행과 삶의 철학

1.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로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했다. 418년 세종 즉위 후 고려의 남경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 건립하였다. 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계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을 위해 확장 공사 도중 창경궁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으로 사용되면서 창경궁은 이궁으로 활용되었다. 광해군 때 1차 중건(명정전, 문정전 등 위주로 중건)되었다가 인조반정~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었다. 후에 인조 11년(1633) 중수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07년부터 대부분 건물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 설치하고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창경궁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 중에 있다. 동양의 궁궐은 보통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치하는데,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이다.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명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창경궁

2. 창경궁의 주요 전각의 특징

(1) 정문 : 홍화문 - 궁궐의 품위를 보여 주는 정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玉川橋,보물 제386호)가 놓여 있고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도깨비 상을 조각했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라는 기록화에 그 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2) 정전 : 명정전 - 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데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명정전은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은 듯하다.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대에는 노인들에게 경로잔치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보다는 왕실의 연희 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다.

 

(3) 편전 : 문정전(사도세자 죽음) - 공식 집무실, 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도세자의 비극 :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 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 이 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4) 침전 - 경춘전과 환경전 -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 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 조선시대의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 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온다.

 

(5)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된다. 뱃속의 태아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다. 성종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6) 춘당지와 내농포 일원 - 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내농포(內農圃) : 내농포는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던 채소밭과 그 관청을 말한다. 창경궁 안에는 내농포에서 관리하는 논과 뽕밭이 있었다. 왕과 왕비는 여기서 각기 농사와 양잠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폈다. 농업을 국가의 기반 산업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는 각기 농사와 양잠을 주재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3. 결론

창경궁은 건축적 화려함과 자연의 고요함이 만나는 역사의 통로이다. 계절의 아름다움, 정원 휴양지, 깊은 역사적 사건등이 서려 있는 창경궁은 과거의 아픔을 딛고 현재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창경궁은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이자 한민족의 불굴의 정신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